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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유럽

베르사유 궁전 방문기-성공한 세종시 베르사유 & 역동적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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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 역사

[ 목차 ]

    1. 파리에 없는 궁전 

    베르사유를 떠올릴 때 파리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본인 또한 베르사유에 가기 전까지는 베르사유가 파리에 있는 줄 알았다. 

    조선시대 궁들을 떠올리면 5대 궁들이 수도에 위치해 있으니

    베르사유도 당연히 수도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베르사유 궁전

    하지만 베르사유는 파리에서 기차로 30-40분이 걸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다. 

     

    파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깝다고 보기는 어려운 베르사유에 왜 궁이 생긴 것일까?

     

    2. 성공한 세종시, 베르사유

    2.1 원래 프랑스 왕들은 어디서 살았나?

    https://www.youtube.com/watch?v=X235vpOToVU

    위 영상을 보면 베르사유 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원래는 루이 13세의 사냥터로 쓰였던 베르사유가 루이 14세 때가 되어서는

    지금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루이 14세 초반의 베르사유 궁전 / 현재의 베르사유 궁전

    원래 베르사유가 루이 13세의 사냥터로 쓰였다면, 

    당대 프랑스의 왕들은 어디서 거주했을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튀일리궁

    베르사유 전에 프랑스 왕들이 살았던 곳은 바로 현재 박물관이 된 루브르 궁전이다.  

    더 정확히로는 튀일리 궁전이다. 

     

    원래 위 사진에서, 라이언이 있던 곳에 존재했던 곳이 튀일리 궁전이었는데,

    1871년에 파리 코뮌으로 전소된 이후에 철거되어 현재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프랑스 왕들은 파리에서 살았다. 

     

    2.2. 아니, 근데 왜 멀쩡한 궁전 냅두고 베르사유로?

    루이 14세 베르사유 베르사유 초창기
    루이 14세 때의 베르사유

    왕권 강화의 산물

    당시 파리에는 정치적인 변동성이 컸다고 한다. 

    파리 의회의 반대파와 반역도 일어났다고 하니, 루이 14세로서는 이러한 외부환경을 멀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베르사유는 파리에서 떨어져 있는 장소이니 이런 외부환경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안정적인 환경에서 왕의 명령에 반하는 반란에 대한 위험도를 낮출 수 있었다.

     

    그리고 루이 14세와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귀족들에게는 높은 직위를 준다고 하니,

    파리에서 거주하는 귀족들도 베르사유로 올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왕 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베르사유로 옮겨오면서

    결과적으로 베르사유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르사유에는 베르사유 궁전만 있는 게 아니라 귀족들이 살았을, 이런 멋진 건물들이 다수 존재한다.

     

    물론 세종시가 만들어진 계기와 베르사유가 만들어진 계기가 다르지만 

    세종시도 청와대부터 옮겨졌다면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걸 못했기 때문에 세종시가 행정수도로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워싱턴 DC처럼 세종시도 수도의 기능을 했으면 좋겠다.

     

    3. 시간이 흘러 외형이 많이 달라진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비대칭
    대칭을 사랑하는 유럽 건축물에서 좌우대칭이 안 맞는 것을 볼 수 있는 베르사유 궁전

    아니, 대칭이 안 맞는데?

    베르사유 궁전 좌측 파빌리온
    파빌리온으로 장식된 좌측 윙. 루이 15세 때 변경됨
    베르사유 궁전 좌측 윙
    전통 프랑스 건축 양식으로 된 우측 윙. 루이 14세 때 건축물이 그대로 있지만 끝에 가서 파빌리온이 루이 18세 때 만들어졌다.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를 알기 전에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바로,

    대칭이 안 맞는다는 것이다. 

    원래 대칭을 그렇게 좋아하는 유럽사람들이 이곳만은 왜 대칭에 맞지 않게 건축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 건물도 아니고 프랑스의 최고 권력자가 거주한 곳인데도 말이다. 

     

    앞서 사진에서 봤듯이, 루이 14세 때의 베르사유 궁전은 대칭을 이루는 궁전이었다.

    위 그림을 보면

    당시 베르사유는 대칭을 칼과 같이 지켰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랬던 것이, 갑자기 성당이 지어지고 궁전이 확장되면서

    대칭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4. 베르사유 거울의 방-역사가 쓰여진 장소

    루이 14세 때 궁전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 베르사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여겨지는 거울의 방에서는

    특히나 독특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과거와 현재를 포토샵으로 겹쳐봤다.

    4.1. 독일제국이 선포되다

    베르사유 거울의 방 독일제국 선포식
    독일제국 선포식.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선포식을 가졌다. 

    프랑스로서는 굴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로 따지면 경복궁 경회루에서 메이지 헌법이 제정된 급이 아닐까 싶다.

    그 때 당시를 그린 그림과 현재 사진을 겹쳐보았다. 

     

    비스마르크와 독일제국의 빌헬름 황제가 서 있었던 곳은 현재 수 많은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곳이 되었다.

    4.2.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다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고 전후 독일에게 전쟁 패배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배상금을 청구했던,

    베르사유 조약도 이곳 거울의 방에서 체결되었다. 

     

    독일제국이 거울의 방에서 선포된만큼, 

    이곳에서 그때의 굴욕을 제대로 갚아주는 장면이다.

     

    베르사유 조약이 서명되었던 테이블이 있던 장소 또한, 여러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장소가 되었다. 

     

    5. 베르사유의 현재와 미래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실이 되었던 베르사유 궁전을 나폴레옹이 다시 쓰려고 했지만 

    막대한 수리비용으로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나폴레옹이 축출되면서 부르봉 왕조가 다시 들어섰고 루이 18세가 다시 이곳에 머무르게 되지만 

    그것도 오래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 박물관
    루이 필리프로 인해 루브르와 같은 박물관이 된 베르사유

    루이 필리프가 베르사유를 박물관으로 만든 이후로는 지금까지 쭉 그 역할을 해내고 있다. 

     

    왕이 다시 들어설 가능성이 전무한 현재 상황에서

    거주지로서의 역할을 다시 못할 것 같은 베르사유가 박물관 이외의 기능 말고는 사용처가 없을 듯하지만

     

    루이 14세가 자신이 살고 있던 공간이 박물관이 될 줄 몰랐듯이

    역할이 언제 또 바뀌게 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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